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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자유기고

우리의 죄는 겟세마니에서 주님께 더 큰 고통이 되었다

작성자|알렉스 

Heinrich Hofmann, Christ in Gethsemane, German, 1886, Riverside Church, New York City.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께 드리는 제물이다.”[각주:1] 그렇지만 교회는 대체로 우리 주님께서 성목요일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성금요일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까지를 그분의 ‘수난’으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고통 가운데 기도하신 일은 로사리오 기도의 첫 번째 고통의 신비로도 기억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각주:2] 주님은 또한 사도 성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성 야고보, 성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각주:3] 주님은 천주 성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각주:4] 루카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각주:5]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지은 죄 때문에 더욱 고통받으셨다

 

복음서의 기록들만 생각하더라도, 주님께서 얼마나 큰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셨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피땀까지 흘리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예견하셨기에 고통스러워 하셨다고들 흔히 생각한다.

 

교회 역시 이러한 생각을 긍정한다. 확실히,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여느 사람과 같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두고 큰 공포에 휩싸이셨다. 하지만 교회 역사에서는 겟세마니에서의 근심과 번민이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두려움만으로 헤아려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심과 동시에 ‘온전한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마음의 고통이 뿌리를 둔 원인은 보다 더 복잡한 것이었다.

 

독일 프리부르 대교구의 보좌였던 유스투스 크네히트 주교(Bp. Justus Knecht)는 겟세마니의 번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의지로 수난에 들어서셨다. 당신의 여덟 사도들과 거리를 두시어 떠나시고, 당신이 비하당하는 때에 당신을 뵙도록 타보르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발현으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던 세 명을 곁에 두실 때까지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당신 마음을 사로 잡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인간 본성이 고통에 시달리게 하시기 위하여, 신성은 인성을 내버려 두었고, 말하자면 신성이 인성으로부터 물러 난 것이다. 내용에서 보다시피 신성은 인성에서 모든 내적 위로를 박탈하였다. 주님은 사도들과 천사들 같은 피조물로부터 위로를 찾으실 정도로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당신 수난의 바로 그 시작에, 주님은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절실히 느끼고 시달리셨음에 대하여, 그리고 그 두려움과 고통과 공포가 원인이 되었음에 대하여 우리가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길 원하셨다. 

우리 주님의 극심한 슬픔과 정신의 끔찍한 번민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 도사리는 비인간적인 많은 고문들을 보셨다. 주님은 이 모든 끔찍한 고난들을 생각하셨고, 예견하시면서 견디어 내셨다. 만약 그대가 내일이 되면 천천히 고문당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되겠는가? 인간 본성은 죽음 앞에, 특히 폭력적인 죽음 앞에 움츠러든다. 가장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기까지 한 죽음이 우리 주님 앞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을 예상하는 일이 주님의 영혼을 공포로 가득 채웠다. 주님께서 죄만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 모두와 같은 참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주님은 당신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의 인간적 의지에는 어떠한 죄스런 반항도 없어 신적 의지를 향한 완전한 복종이 그대로였고, 주님은 덧붙이셨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2.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어 하느님의 정의에 인간 대신 보속을 바치고자 하셨다. 이제 주님께서 구속 사업을 완수하려는 시점에 다다르셨을 때, 악과 가증스러운 것, 죄책의 소름 끼치는 무리가 주님의 거룩한 영혼에 찾아 와 당신 영혼을 혐오와 증오로 채웠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순결하신 분께서 온 세상의 죄들, 교만의 죄, 음란의 죄, 탐욕의 죄 등을 짊어진 당신 자신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을까! 죄의 수치스러운 배은망덕함에 대한 고통이 막달레나와 베드로에게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홀로 그 지독함을 완전히 알고 계시는 분께서 느끼셨을 죄에 대한 혐오감이 어떠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개별적인 죄를 보셨고, 마치 당신께서 그 죄들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해 하셨으니, 이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 지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만일 주님께서 당신 영혼을 붙들어 매지 않으셨다면 이 비통함만으로도 그분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더 많이 견디기 위하여 고난의 잔을 한 방울 남김 없이 드셨다. 주님은 올리브 동산에서 죽지는 않으려 하셨으니, 당신 생명이 갈바리아에서 희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피를, 번민의 피땀을 흘리셨다. 사형집행인이 거들지 않더라도, 죄만으로도 당신께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보쉬에). [각주:6]

 

즉, 예수님께서는 단지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위로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박탈하셨다. 또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면서 스스로 그 죄를 짓기라도 하신 것처럼 고통스러워 하셨다. 크네히트 주교의 말마따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 베드로가 스스로 지은 몇 가지의 죄만을 두고서도 그토록 쓰라린 눈물로 통회했다면, 자신이 짓지도 않은 모든 인류의 죄를 모조리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우리는 흉악한 범죄는 물론이요 아주 사소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나한테 돌린다면 노발대발 하면서 역정을 낸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죄를 ―거룩하신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만큼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온전히 감당해 내셨다.

 

겟세마니에서, 아직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우리 주님을 죽도록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우리들 자신이 늘상 범한 바로 그 죄들이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우리가 하다 못해 죄를  지었더라면, 주님께서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라 단언한다.

아, 저의 사랑하올 예수님, 저는 이 동산에서 당신을 찌르는 채찍도 가시도 못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로 물든 당신을 제가 보았습니까? 아아, 저의 죄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마음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잔인한 압박이었습니다. 저의 죄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제일로 이바지한 저는 당신의 가장 잔혹한 사형집행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죄를 덜 지었더라면 저의 예수님께서 덜 고통받으셨을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당신을 욕 보임으로써 기쁨을 누린 만큼 이미 고뇌로 가득 찬 당신 마음의 슬픔을 더 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오면 당신께서 제게 보여주신 사랑과 당신의 수난에 제가 슬픔과 고통을 더함으로써 보답한 일을 목도할 때에, 이러한 생각이 어찌 나를 비탄으로 죽게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스럽고 또 사랑받아 마땅하올 이 마음을 저는 고문하였습니다. 저의 주님, 제게는 이제 당신을 욕되게 한 저의 잘못을 두고 슬피 우는 것 외에는 당신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저의 예수님, 저는 이제 그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제 온 마음으로 탄식하겠습니다. 오, 당신께 제가 비오니, 그것을 위하여 제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당신께 제가 끼쳐드린 불쾌함을 두고 울만한 크나큰 고통을 주소서.[각주:7]

 

이러한 고통 가운데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각주:8] 여기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주님의 기도의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소서”와 같은 말이다. 과연 주님께서는 기도의 내용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그 기도의 말이 지니는 무게가 어떠한지까지 몸소 보여 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속죄로 위로를 받으셨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각주:9] 교황 비오 11세는 우리 주님께서 과거와 미래, 모든 시대에 저질러진 모든 죄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으셨으나, 하늘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주님께서 또한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한 모든 보속과 배상을 보시고 위안을 얻으셨다고 가르쳤다.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하였던 주님을, 지금 우리가 위로해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천상 지복 가운데 통치하고 계신 지금에 와서 이러한 속죄의 예식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위안을 드릴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본인은 “사랑이 있는 사람을 내게 준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In Johannis evangelicum, tract. XXVI, 4)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매우 적절하다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이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면,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가운데 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을 위한 수고와 고통, 크나큰 고뇌에 시달리심과 슬픔으로 인하여 거의 기진맥진하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으스러진 것”(이사 53,5)을, 그리스도의 으스러지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한 이들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더욱 진실히 묵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저질러진 사람들의 죄와 범죄가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고, 이제 그 사람들 자신도 동일한 비탄과 고통에 가담하여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며, 각인각색의 여러 죄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주님의 수난을 갱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다시 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는 셈이니”(히브 6,6). 이제 아직 미래의 일임에도 예견되어진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에 잠기게 되었다면, 역시 그때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피로함과 괴로움으로 억눌린 그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난”(루카 22,43) 때, 마찬가지로 예견된 것으로서 우리의 배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위안을 얻으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도 우리는 놀랍고도 진실된 방식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를 입으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 위로를 드릴 수 있고 또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 우리가 거룩한 전례 가운데 읽었듯이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당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음을 호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각주:10]

 

물론,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천상의 영원한 복락 가운데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2천 년 전 게쎄마니에서 고통당하실 때, 그리스도인들의 속죄 행위를 미리 예견하시고 그로부터 위로를 얻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각주:11] 하셨던 분의 동정과 위로가 되어 드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겟세마니에서 고통당하신 주님께 대한 묵상의 실천적 함의다.

 

Unidentified South Andean Artist, Agony in the Garden with Saints Augustine and Nicolas of Bari, 17th or 18th century, Convento de Santa Teresa, Ciudad y Departamento de Potosí, Bolivia.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한 배상의 뜻을 지닌 기도와 선행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겟세마니의 주님께 위안을 드릴 수 있다. 간단한 화살 기도부터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 기도(특히 고통의 신비), 성체 조배와 성시간, 그리고 단식과 자선까지. 특별히 사순 시기는 이러한 속죄의 실천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주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는 데 가장 적절한 시기일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알고 그 누가 속 편히 죄를 지어 주님을 더 아프게 해드릴만큼 무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 누가 주님께 위로 드리기를 지체할만큼 나태할 수 있을까!


[각주]

  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606항. [본문으로]
  2. 마태 26,37. [본문으로]
  3. 마태 26,38. [본문으로]
  4. 마태 26,39. [본문으로]
  5. 루카 22,44. [본문으로]
  6. Friedrich Justus Knecht, A Practical Commentary on Holy Scripture, trans. and ed. from the 16th German ed. (St. Louis, MO: B. Herder, 1910), pp. 652-653. [본문으로]
  7. St. Alfonso Maria de Liguori, The complete works of Saint Alphonsus de Liguori : the ascetical works: Volume 5 The Passion And The Death Of Jesus Christ (New York : Benzinger Brothers, 1887), pp. 67-68. [본문으로]
  8. 루카 22,42. [본문으로]
  9. 루카 22,43. [본문으로]
  10. 교황 비오 11세, 회칙 「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속주」(Miserentissimus Redemptor), 1928.5.8.,13항. [본문으로]
  11. 시편 69,2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