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알렉스

이마에 재를 바른 지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샌가 사순 제2주간에 들어섰다. 글쓴이는 지난 주일 생계를 위한 노동을 마치고 직장 인근 명동 성당의 밤 9시 미사에 참례했다. 여느 사순 시기 미사가 다 그렇듯이 구슬프고 눈물 쏙 빠지는 성가를 부르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기억이 정확하다면― 입당 성가로 ‘다볼 산의 예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어인 일인고 하니, 사순 제2주일에 기념하는 것이 타보르 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1였다. 매년 똑같이 기념한다 하더라도 한 해가 지나면 또 새롭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에는 확실히 가슴 미어지는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 짐작했으나, 파견 성가는 비교적 경쾌한 곡조의 ‘성 요셉 찬양하세’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 3월이다. 성 요셉 성월!
가톨릭 교회는 매년 3월을 성 요셉 성월로 지내고 있다. 3월 19일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성목요일과 더불어 사순 시기 도중에 사제가 백색 제의를 입고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유일한 날이다. 이 슬픔과 보속의 때 가운데에도 부활에 버금가는 기쁨으로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틈이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주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 요셉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절을 흠숭지례-라트리아(latria)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그 다음으로 높은 예절을 상경지례-히페르둘리아(hyperdulia)로, 그 외의 천사나 성인 성녀들에게 드리는 보다 낮은 예절을 공경지례-둘리아(dulia)로 구분한다. 성 요셉에게 드리는 예절의 경우는 프로토둘리아(protodulia)라고 한다.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상경지례보다는 낮지만 여느 천사나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지례보다는 높은 예절이다. 성 요셉이 동정 마리아 바로 다음 가는 분이라는 의미다.
교회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성 요셉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성 요셉에게 이토록 주목하게 된 역사는 결단코 길지 않다.2 성 요셉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토록 보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단언컨대 르네상스 이후, 특히 19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교회 역사 속의 성미술 발전을 관찰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중세 때의 성탄 묘사들을 보면, 백발의 노인으로 묘사되는 성 요셉은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하고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며, 천사, 산파, 목동들과 같은 주변 인물들과 거의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요셉은 성탄 때의 엑스트라로 잠깐 등장할 뿐, 14세기까지 교회 역사에서 요셉만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는 기록으로든 예술로든 아예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부들도 요셉에게 관심이 없었다. 주님의 성탄에 관련된 역사를 이야기할 때 뜨문뜨문 짧게 언급될 뿐이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과 마리아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할애하는 이슬람교의 꾸란조차 요셉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을까. 10세기 이후에 겨우 일부 지역 교회에서 3월 19일을 요셉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 수많은 성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리 요셉이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닌 양부(養父)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양부 취급조차 못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린 시절 성전에 봉헌되신 동정 마리아의 삶에 관한 초대 교회의 전승을 반영하는 2세기 초의 신약 외경 「야고보 복음서」(Gospel of James)는 요셉을 사별한 전처와의 자녀를 두고 있는 늙은 홀아비로 기록한다. 이 아주 이른 시기의 문헌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와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성전 사제가 요셉에게 “그대는 제기 뽑기를 통하여 주님의 동정녀를 그대의 아래 보호할 것으로 선택받았소” 하고 말하며, 형식적인 약혼 아래 소녀 마리아를 순결하게 보호할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저는 아이들이 있는 늙은이인데, 그녀는 어린 여자아이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웃음 거리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3 하는 요셉의 반응을 보면, 그는 이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성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요셉의 모습에 익숙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당혹스러울 것이다. 요셉이 예수님의 양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마리아의 양부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할지 모른다.
성 요셉과 ‘쥐덫’
하지만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알게 모르게 요셉의 중요성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15세기에 성모영보를 주제로 제작된 <성모영보 삼면화>(The Annunciation Triptych)를 주목해보자. <메로드 제단화>(The Mérode Altarpiece)라고도 불리우는 이 제단 삼면화는 후기 고딕, 초기 플랑드르 양식에 기초한 작품으로서 미술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좌우간 이 제단화의 중심 주제는 성 가브리엘 대천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주님의 강생하심을 알리는 장면이다. 요셉은 우측 패널에 홀로 자리 잡고 있으며, 목수라는 직업에 걸맞게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이 성화를 보면, 역시나 요셉은 성모영보라는 중요한 사건에 있어서 여전히 독립된 엑스트라처럼 여겨질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요셉이 구석에서 조용히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셉이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쥐덫이다.

쥐덫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예컨대,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저술에서 악마를 패배하게 만든 주님의 십자가를 여러 번 쥐덫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구속주께서 오셨고 기만자가 굴복당하였다. 우리 구속주께서 우리를 포로 삼은 자에게 무엇을 하셨나? 우리의 몸값을 삼기 위하여 당신 십자가라는 쥐덫을 놓으셨고, 당신의 피를 거기에 미끼로 두셨다.4
교회 안의 전통적인 해석 중 하나에 따르면, 악마는 이 세상에 대하여 거의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결코 전지(全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탄과 마귀들이 그리스도를 보고도 그분께서 하느님이신 줄을 모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마귀들의 정신은 신적인 지혜에 대하여 아주 뒤틀려 있는데, 그들은 간혹 사물의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사물에 대한 자기 의견을 단순하게 형성한다. 그들은 어떤 것의 자연적 속성에 대해서는 결코 기만당하지 않지만, 초자연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예컨대 죽은 사람을 보고서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거나, 그리스도를 보고서 하느님이실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5
사실 사도 성 바오로 역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6
확실한 것은, 악마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 신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허름한 마구간, 금수들의 여물통에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태어난 저 아기가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모진 고문으로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할]”7 정도의 저 나자렛 사람이 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것이 과연 창세 이래 계속되는 선과 악의 전쟁에서 비할 데 없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가려낼 개선식의 현장임을, 골고타 언덕 위의 그 수난이 마침내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리라는 사실을 대체 짐작이나 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8
사탄은 그분을 지옥에 데리고 와서야 깨달았다. 그분이 진정 전능하신 하느님이시요, 죽음의 권세를 처 부수러 오신 위대한 승리자이심을. 그리고 이 전쟁에서 자신이 전대미문의 패배에 처했음을 말이다.
자신이 가두고 있던 거룩한 영혼들을 그리스도께서 모조리 꺼내 가셨을 때, 악마에게 눈물이 있다면, 틀림없이 목이 찢어져라 통곡했을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의 강생부터 십자가까지,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덫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아무도 모르게 그 덫을 조용히, 침묵 가운데 다듬어 나가고 있었다. 구속사에 있어 요셉의 역할은 결코 가벼운 것도, 사소한 것도 아니었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9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하여 파혼을 고민하던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서 마리아를 지켜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작정하였다.10 요셉은 복되신 동정녀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헤로데의 위협으로부터 그분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였다.11 이러한 요셉의 역할은 비록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교회 안에서 주목받지 못하였을지언정,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제외하고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극히 존귀한 의무를 다 한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쥐덫을 만들고 있는 요셉의 모습으로 아주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느님 섭리의 때가 왔다. <메로드 제단화>가 완성된 지 약 반 세기 뒤인 1479년, 3월 19일 성 요셉의 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추가되어 보편 교회의 축제 날이 되었다. 이후로 요셉의 중요성은 훨씬 부각되었다. 성미술 작가들은 더 이상 요셉을 힘없고 나이 든 주변 인물로 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는 훨씬 혈기왕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성모자의 곁에서 적극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돌보는 성가정의 가장, 비컨대 ‘지상의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더 많은 성화들과 자세한 배경을 알려거든 마거릿 더피(Margaret Duffy)의 이 글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교회의 위대한 영성가들은 점차 성 요셉의 위대한 업적을 찬송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강론은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으면서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에 따라 하십니다. 즉 특별한 은총을 주시려고 또는 특별한 위치에 올리시려고 어떤 사람을 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법칙은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이시며 세상과 천사들의 여왕의 참된 배필이신 성 요셉에게 훌륭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요셉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보화이신 외아드님과 성모님의 부양자와 보호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
요셉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요셉 안에서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받은 약속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성조들에게 약속으로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 실현된 것을 요셉 홀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도 지상에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자,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기쁨은 비록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사람이 그 기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 기쁨이 단순히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사람을 감싸 주고 마치 하느님의 끝없는 심연 속에 삼켜지듯 사람을 흡수해 버린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복되신 요셉이여, 우리를 기억하시어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로 여긴 그분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소서. 또 당신의 정배이시며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12
난세 가운데 성 요셉께 도움을 청하는 교회
근대에 이르러 교황들은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을 더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했다. 1870년, 교황 복자 비오 9세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보불전쟁의 여파로 교황령과 세속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고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하여 그 영적 권위마저 도전받던 위기와 고립의 상황 가운데 교령 「하느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Quemadmodum Deus)를 통하여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를 수호하였던 요셉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수호하리라는 지극히 합당한 생각이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여러 번이었을지라도」(Quamquam Pluries)를 통해 3월 전체를 요셉에게 봉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 요셉을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고 또 교회가 요셉의 수호와 보호로부터 빼어난 유익을 기대하는 특별한 동기는, 요셉이 마리아의 정배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13 레오 13세 역시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던 것이다.
경애하올 형제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최악이었던 때, 교회에 비극이 가장 들어찼던 과거의 때보다도, 이 시대는 덜 개탄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모든 덕의 뿌리인 신앙이 많은 영혼 안에서 줄어만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애덕이 식어 가고, 젊은 세대가 도덕과 견해의 패륜 속에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공공연한 무력이나 기술로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것, 최고 목자에 대항하여 벌어지는 가차 없는 전쟁, 종교의 기반 그 자체가 나날이 강렬하여지는 대담함에 꺾여만 가는 것을 봅니다. …… 이토록 불행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처방은 불충분합니다. 신적인 권능의 도움을 구하는 것만이 요구되는 유일한 자산인 것입니다.
14
이 외에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자의교서 「진실로 좋은 일」(Bonum Sane)을 통해 “진정 지나간 때를 되돌아보노라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조 요셉에 대한 공경이 여태까지 서서히 성장하여 왔음을 드러내는 경건한 관습의 연속과 과정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다만 오늘날 인류가 얽혀 있는 쓰라린 상황을 주시하노라면, 이 신심이 백성들 가운데 보다 더 열렬히 길러지고 보다 더 널리 전파되어야 함이 명백합니다”15 하고 밝히며 성 요셉에 대한 각종 신심 행위를 장려했다. 여기서 베네딕토 16세가 “쓰라린 상황”이라고 불렀던 것은 하느님과 은총을 거부하는 자연주의,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불평등으로 인한 계급 갈등, 그로 인한 사회주의, 혼인의 거룩함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훼손되는 일들이었다.
이러한 교황들의 공통점은 교회가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 놓였음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 요셉의 도움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제껏 미처 잊고 있었던 보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갖은 어려움에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분, 살아생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보호하는 데 헌신하셨던 분, 말없이, 침묵 가운데 조용히 당신의 의무를 마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임종을 지켜 주셨던 유일무이하신 분.
사도 성 야고보는 말하였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16 그렇다면 바로 이 의인이신 성 요셉의 기도는 얼마나 큰 힘을 지닐 것인가? 그분의 공로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며, 그분의 보호를 깨고 우리를 해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나?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기나긴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찬란히 빛나는 등불의 빛을 드디어 우리 모두에게 비추게 되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7
“이 위대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덕행과 열정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에서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를 발표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 요셉께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였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18
그리스도께서 저승에서 죽음의 지배 아래 있던 의인들을 꺼내 가셨듯이,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여 주셨듯이, 성 요셉께서도 이 교회가 어려운 때를 극복해 내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으며,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앗아 오셨을까?
악마들은 또 한 번 예상치도 못한 공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실로 성 요셉은 우리 주님에 준하는 또 하나의 쥐덫이었다.
[각주]
- 마태 17,1-9 참조. [본문으로]
- 라트리아, 히페르둘리아, 둘리아는 각각 흠숭지례(欽崇之禮), 상경지례(上敬之禮), 공경지례(恭敬之禮)라는 예스러운 한자말 번역어가 있지만 프로토둘리아는 없다. 즉 프로토둘리아라는 개념 자체부터 가톨릭 교회가 한자 문화권에 전래되어 정착한 이후에라야 생겨난 개념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야고보 원복음서」(The Protoevangelium of James), 9장 참조, newadvent.org. [본문으로]
- “Sed venit Redemptor, et victus est deceptor. Et quid fecit Redemptor noster captivatori nostro? Ad pretium nostrum tetendit muscipulam crucem suam: posuit ibi quasi escam sanguinem suum.” - 성 아우구스티노, 「130번째 강론, 오병이어에 관한 기적이 서술된 요한 복음서 6장 5-14절에 관하여」(SERMO CXXX. De verbis Evangelii Ioannis, ubi narratur miraculum de quinque panibus et duobus piscibus. Cap. V, V. 5-14), 2, monumenta.ch. [본문으로]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 q. 58, a. 5. newadvent.org. [본문으로]
- 1코린 2,8. [본문으로]
- 이사 52,14. [본문으로]
- 1코린 2,9. [본문으로]
- 마태 1,19. [본문으로]
- 마태 1,18-25 참조. [본문으로]
- 마태 2,13-15 참조. [본문으로]
-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Sermo 2, de S. Ioseph: Opera 7,16. 27-30,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의 성무일도 제2독서에서 발췌. [본문으로]
- 교황 레오 13세, 회칙 「여러 번이었을지라도」(Quamquam Pluries), 1889.8.15., 3항. [본문으로]
- 교황 레오 13세, 회칙 「여러 번이었을지라도」(Quamquam Pluries), 1889.8.15., 1항. [본문으로]
- “Respicientibus quidem hoc spatium praeteriti temporis, obversatur Nobis ante oculos continuatio quaedam seriesque pie institutorum, quae cultum sanctissimi Patriarchae apud Christi fideles sensim usque adhuc crevisse indicent : verum, intuentibus rerum acerbitates quibus hodie humanum genus connectatur, hanc ipsam pietatem multo studiosius foveri in populis, multoque latius propagari apparet oportere.” - 교황 베네딕토 15세, 자의교서 「진실로 좋은 일」(Bonum Sane), 1920.7.25. [본문으로]
- 야고 5,16. [본문으로]
- 루카 8,16. [본문으로]
- 교황 프란치스코,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2020.12.8., 8항,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