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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자유기고

고해소 안에 진정한 ‘화해’가 임하기를

작성자|알렉스 

프란체스코 노벨리(Francesco Novelli), <고해성사>(SACRAMENTUM POENITENTIA), 1800년.

 

지금과 같은 사순 시기, 혹은 대림 시기에는 오로지 한국 천주교에만 있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바로 ‘판공성사’다. 한국 신자들은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만 되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은 뒤 고해소 안에서 자신의 교적 정보가 적혀 있는 판공성사 표를 제출해야 한다. 만일 3년 이상 판공성사 표를 제출하지 않은 신자의 경우, 교적 상 ‘냉담자’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 시즌만 되면 평상시에는 끽해야 신심 좋은 한두 명만 있던 고해소 앞 대기 줄이 갑작스레 신자들로 붐비게 된다. 우리 본당에서는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구역 별로 정해진 날짜에 판공성사를 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신자들이 구역 별 날짜가 아닌, 자기가 판공성사를 하고 싶은 날에 판공성사를 하다 보니, 어떤 날은 판공성사를 하려는 신자들이 너무 몰려서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님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본당 신부님 왈, 하루만 거의 100명 가까이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한다. 과연 고될만하다.

 

교회법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을 것을 신자의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각주:1] 한국에서는 2번인 셈이다. 제 아무리 자기가 죄 없이 살았다 생각하는 신자일지라도, 자잘한 소죄라도 좋으니 1년에 한두 번은 꼭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스스로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라는 의도일 테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일인 성탄과 부활을 준비하는 이 때야 말로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기에 매우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이 판공성사 제도 이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 딴 판이다. 냉담자들이 손 꼽는 1등 냉담 사유가 바로 고해성사다. 2007년 수원교구 복음화국의 「쉬는 교우 대상 설문분석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냉담자들의 냉담 사유 1등은 ‘고해성사’(25.3%)였다.  2008년, 가톨릭신문에서 발표한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통계 역시, 냉담자들이 원하는 교회의 사목적 도움 중 제1순위가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경감’(33.9%)이었음을 전한다.

 

이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운 의무’로 여기고 있음을 방증한다. 평상시에는 휑하디 휑한 고해소 대기 줄이 판공 시기에만 발 디딜 틈 없이 신자가 몰리는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어느 사제의 증언에 따르면 판공성사 때 ‘고백할 죄가 없는데, 판공성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는 신자도 있었다고 한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대죄를 지었음을 자각한 모든 신자는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며, 특히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는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각주:2] 만일 대죄를 짓고 고해성사 없이 성체를 영할 경우, 성체를 모독하는 모령성체가 된다.[각주:3] 이를 두고서 ―물론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없으나― ‘사람이 소죄는 물론이고 대죄를 안 짓고 사는 것조차 어려운데,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은 적으나 거의 모든 신자가 미사 때 성체를 영하러 나가니,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령성체를 범하고 있구나’ 같이 키치한 추측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대죄 하나 안 짓던 신자들이 유독 판공성사 시즌만 되면 갑자기 이때다 하고 죄를 짓기 시작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는 분명 고해성사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신자들이 적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심지어는 고해성사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또 일상 속에서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고해성사를 그 무슨 ‘죄 지을 때마다 고해소에 들어 가서 형식적으로 사면받고 나오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자들을 탓할 수 없다. 신자들의 교리 지식 결핍은 사목 현장에서 제공하는 교리 교육의 문제가 원인이다. 이 뿐만 아니다. 유독 판공성사 시기만 되면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런저런 얘기할 필요 없이 지은 죄만 간단히 고백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구구절절 설명하다 보면 남 험담을 할 수 있기 때문에’라는 그럴싸한 구실을 덧붙이곤 한다. ‘고해 내용이 길어지면 판공성사를 하는 내가 힘들기 때문에’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 사제도 있다. 이 역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심어주는 원인이다.

 

명동성당 고해소에 붙어 있는 안내문으로 인터넷에 퍼져 있는 사진. 

 

확실히 사순 시기는 주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을 다 잡기에 더 없이 적절한 때이다. 사순 제2감사송의 기도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마음을 다시 깨끗하게 하시려고, 구원과 은총의 시기를 특별히 마련하시어,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 덧없는 일을 피하고,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힘쓰게 하셨나이다.”

 

하지만, 막상 ‘이때다!’ 하고 고해성사를 몰아 하는 것을 두고서 ‘이것이 사순 시기에 걸맞는 태도냐’ 하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오히려 이 사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일상의 고해성사가 진정 “회개의 성사”, “용서의 성사”, 더 나아가 “화해 성사”[각주:4]가 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하겠다. 

 

 

더 적극적인 양심의 성찰

 

고해소에 들어 가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받은 후에) 스스로 지은 대죄에 대해 성찰해야 하며, 소죄까지 성찰하는 것 역시 매우 유익하다. 기억력의 문제로 모든 죄를 다 기억해낼 수는 없겠으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 면밀히 생각해 보고 가능한 한 내가 범한 모든 대죄를 기억하려 애 쓰는 것이 좋다.

 

『천주교 요리문답』 제244문답은 대죄의 횟수와 종류까지도 성찰해야 하며, 소죄를 대죄가 되게 했거나 하나의 대죄로 인하여 두 가지 이상의 계명을 위반하게 되는 경우까지 성찰할 것을 지시한다.

244. 문 : 자기 범한 각 대죄에 대하여서는 성찰할 것이 무엇이뇨?
답 : 성찰할 것은 그 번수(番數)와 종류(種類)와 종류를 변케 하는 연유(緣由)니라.

245. 문 : 죄의 종류를 변케 하는 연유는 무엇이뇨?
답 : 두가지 있으니 하나는 소죄를 대죄되게 하는 연유요, 둘은 대죄되는 한가지 행실로 여러가지 계명(誡命)을 범하게 하는 연유니라.[각주:5]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완전히 의식하면서, 고의로 저지른 죄는 대죄이다.’”[각주:6]

 

“중대한 문제”란 말 그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중대하게 어기는 문제들을 말한다. 이는 십계명에 매우 뚜렷하게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십계명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어겨야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제1계명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를 어기는 죄 중에는 타로나 사주를 보는 것과 같은 점과 마술 행위 역시 포함된다.[각주:7] 제6계명 “간음하지 마라”를 어기는 죄 중에는 기혼자의 간통이나 혼외 성관계뿐 아니라 정결을 어기는 모든 죄들, 특히 “자위행위, 사음, 매매춘, 포르노의 제작과 배포, 동성애”[각주:8]도 포함된다. 제8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에는 비단 거짓말뿐만 아니라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은연중에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타인의 결점이나 과실을,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 없이 알리는 사람”도 해당된다.[각주:9]

 

“완전한 의식”이란 본인이 저지른 죄가 중대한 문제임을 알고 저질렀는가, 모르고 저질렀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는 반드시 어떤 죄에 대한 정확한 교리적 정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길을 가다 어르신한테 어깨를 부딪혔다는 이유로 폭언을 내뱉는다든가, 직장 후배를 두고 동기들끼리 음란한 농담을 하는 것이 중대한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심에 따라서 깨우칠 수 있는 죄를 제외한 그 외에 죄들에 대해서 정말로 모르고 저질렀을 경우, 즉 “고의가 아닌 무지는 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각주:10] 하지만 “가장된 무지와 마음의 완고함은 죄의 고의적인 성격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린다.”[각주:11] 예컨대 피임이 죄인 줄 몰랐던 어느 신자가 다른 교우로부터 ‘피임은 중대한 죄악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에이, 그런 터무니 없는 교리가 어디 있나’ 하고 제대로 알아 보지도, 따져 보지도 않는다면 이는 교리서에서 말하는 “가장된 무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고의로 저지른 죄”는 전적인 동의에 따라 저질러진 죄를 말한다. 다만, 습관, 충동(passion), 두려움, 외부의 강제 등의 상황적 요소들은 죄의 고의성을 경감시킨다.

 

습관의 경우는 이렇다. “만일 한 사람에게 나쁜 습관이 형성되어서, 당장은 진지하게 습관을 뿌리 뽑고자 노력하나 주의를 아주 조금 기울일 때 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곧잘 악한 행위를 저지른다면, 주의 없이 그 습관으로부터 비롯된 무슨 행위든지 비자발적인 것이다.”[각주:12] 이와 비슷하게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판단을 어렵게 만들 정도의 충동, 두려움, 외부의 강제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죄의 식별, 또는 성찰이 익숙치 않은 신자들은 자칫하면 세심증에 빠질 수 있다. 세심증이란 죄가 아닌 것을 죄라고 착각하거나, 소죄를 대죄인 줄로 오해하거나, 혹시라도 죄를 지을까봐 지나친 불안과 강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러한 신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권하고 싶다.

 


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십계명에 관해 다루는 내용들, 특히 2083항부터 2557항까지를 정독해 보라.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최소한의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책 기준으로 140페이지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평생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결코 긴 내용은 아니다. (권장하고 싶진 않지만) 대략적인 죄의 목록만 간략히 알고 싶다면 중간 중간 “간추림” 대목만 읽어도 좋겠다. 훨씬 짧을 것이다.

 

② 매일 또는 자주 양심 성찰을 하라. ‘반성 기도’‘고백 기도’를 바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유혹이 찾아 왔는지, 무슨 죄를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 죄가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내가 이 죄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이 죄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등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성찰해 보는 것이다. 노트에 적어 놓는다면 고해성사를 받기 전 성찰 때 유용할 것이다.

 

③ 사제와 상담하라. 사제는 내 영혼의 의사와도 같다.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애매한 문제나, 끊기 어려운 죄의 습관이 있다면 본당 사제에게 면담을 요청해서 자세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다.


위와 같은 사안들을 차근 차근 되새겨 본다면, 고해성사 전 성찰 때에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 본다. 교리서는 특히 성찰 때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들로 “십계명에서,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한 가운데 윤리적인 부분, 예컨대 산상 설교와 사도들의 가르침”[각주:13]을 추천하고 있다.

 

 

통회는 죄를 미워하고 끊어내는 것

 

고해소에 들어가기 앞서 성찰을 마쳤다면, 성찰한 모든 대죄에 대해서 통회해야 한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각주:14] 고해성사는 반드시 참회자의 통회가 있어야만이 유효하며, 통회 없이 고해성사를 받는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마음의 고통”이라는 단어 때문에 통회가 반드시 어떤 슬픈 감정을 뜻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통회는 죄를 미워하고 끊어버리겠다는 의지의 결단이며, 슬픔이란 그 의지에 뒤따르는 것일 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통회가 “고통”으로 정의되긴 하나, 신자들은 그 때문에 이 고통이 감정적인 느낌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 통회는 의지의 행위이며, 성 아우구스티노가 관찰하였듯이, 고통은 참회 자체가 아니라 참회에 수반되는 것일 뿐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은 “고통”을 두고 죄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각주:15]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에 따르면, 통회는 내부적(interior), 초자연적(supernatural), 전적(universal), 궁극적(sovereign)이여야 한다.[각주:16]

 

통회는 내부적이다. 시편은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각주:17] 하고 노래한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엘 예언자를 통해서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각주:18]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는 통회가 사람 내부의 일이지, 외부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오열한다든지, 특정한 기도문을 바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슬프고 울적한 감정이 들어야 한다거나, (영적 체험을 좋아하는 신자들이 으레 말하듯) 무슨 뜨거운 느낌,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죄를 혐오하고 끊어버리겠다는 다짐이면 충분하다.

 

통회는 초자연적이다. 이는 통회가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인한 것임을 의미한다. 시편은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각주:19] 하고 기도함으로써 통회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분명히 한다.

 

또한 이는 통회의 동기, 즉 통회하는 이유가 초자연적인 동기여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내 죄로 인해 하느님을 욕되게 한 것, 교회에 상처를 입힌 것, 천국을 잃고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을 생각하여 통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내 명예가 실추되었거나 재산을 잃게 된 것과 같은 자연적인 동기만을 가지고 후회하는 것은 통회가 아니다.

 

통회는 전적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각주:20] 즉, 어떤 상황에든지, 앞으로는 내가 지은 대죄를 포함하여 그 어떠한 대죄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예컨대 어떤 죄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면서 어떤 죄는 기회가 되면 다시 지을 계획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통회가 될 수 없다.

 

통회는 궁극적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각주:21] 나한테 어떤 불이익이 닥치더라도, 설령 죽음의 위험이 닥친다 할지라도 결코 대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만이 진실된 통회다.

 

다만, 이는 하느님의 계명이나 교회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일 미사 참례를 거르거나 금육재를 지키지 않는 것은 대죄지만, 교회는 생명이나 건강에 치명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의무들을 관면해 준다. 낙태의 경우, 산모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산모를 살리기 위한 수술 과정에서 태아가 죽는 것은 낙태로 간주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회가 궁극적이여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고통이나 악보다도 영혼의 문제를 우선하려 하는 다짐을 의미한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통회는 또한 그 동기에 따라서 완전한 통회(상등통회)와 불완전한 통회(하등통회)로 나뉜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통회를 ‘완전한’ 통회(사랑의 통회)라 한다. 이 통회는 소죄를 용서해 주며, 가능한 한 속히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이 포함된 경우 죽을죄도 용서받게 해 준다.

‘불완전한’ 통회(뉘우침)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이 통회는 죄의 추악함이나 죄인을 위협하는 영벌과 다른 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두려움의 통회). 이러한 양심의 동요는 은총의 감도 아래 성사로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완성되는 내적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통회는 그 자체로써는 대죄의 용서를 얻지 못하며, 고해성사로 용서받도록 준비시킬 뿐이다.[각주:22]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죄로 인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예수님의 성심에 상처 입힌 것을 생각하여 통회하면 그것은 완전한 통회이며,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뜻을 품으면 대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

 

죄 자체의 추악함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통회하면 불완전한 통회이지만,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데에는 불완전한 통회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교회는 예로부터 가능한 한 자주 완전한 통회를 할 것을 권장해 오고 있다. (항간에 ‘완전한 통회를 했는지 아닌지는 하느님밖에 모르시며 스스로는 알 수 없다’라는 낭설이 퍼져 있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이렇듯 통회에 대한 가르침이 일견 복잡해 보인다 하여, ‘내가 정말 통회를 한 게 맞을까’ 하는 세심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신학자들은 통회의 ‘강도’나 ‘정도’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어떠한 대죄이든지 혐오하며,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통회를 한 것이다.

 

어렵게 느껴진다면, 단지 ‘통회 기도’를 진심으로 바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기도문에는 진실된 통회의 원칙, 심지어 완전한 통회의 원칙이 담겨 있다. 시편 51편이나 ‘십자가의 길’(특히, 성 알폰소 리구오리의 십자가의 길) 또한 진심 어린 통회에 있어서 최적의 기도가 될 것이다.

통회 기도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악을 저지르고 선을 멀리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은 다시 죄 지을 가능성이 0%임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다. 통회를 하고 나서도 또 다시 대죄를 지을 수 있다. 단지, 다시는 대죄를 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겠다는 다짐일 뿐이다. 최선을 다짐하는 것이 통회이지, 완벽을 보증하는 것이 통회가 아니다.

 

 

섬세한 고백에는 더 많은 유익이 따른다

 

통회까지 마쳤다면, 이제 늘 해 왔듯이 고해소로 들어 가 성찰한 죄들을 고백하면 된다. 죄 목록만 띡 전달하고 마는 것은 좋은 고해성사가 아니다. (누차 반복하지만, “죄지은 이유 설명하지 마시고 지은 죄만 간단히 고백하세요”라는 권장사항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제에게 성찰한 모든 내용을 다 읊지는 못할지라도, 죄 내용에 덧붙여 대략적으로나마 전달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사제가 나의 영혼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어떤 죄가 어떻게 습관이 되어 쉽게 넘어지는지를 짐작하여 유익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폐렴에 걸려 잦은 기침, 피 섞인 가래, 고열, 두통 등의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한테는 ‘요새 기침이 잦다’ 정도만 얘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담 의사는 폐렴은 무슨, 그저 경미한 감기 증상인 줄 알고서 적당한 처방을 하고 진료를 끝낼 것이다. 의사한테도 어느 정도 자세한 증상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하물며 영혼의 의사인 사제에게 간단한 죄 목록만 전달하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고백하는 내용의 질에 따라서 사제가 건네 주는 조언의 질도 달라질 것이다. 좋은 조언을 받아야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죄를 끊어 내고 은총에 걸맞는 삶을 사는 데에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대죄의 횟수까지 대략적으로라도 고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죄의 빈도에 따라서 그 죄가 우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습관이 된 죄인지 사제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적어도 성찰한 대죄 자체는 남김 없이 고백해야 한다. 하나라도 고의적으로 숨긴 채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로 퉁친다면, 그때 고해한 그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뿐더러 고해성사를 모독한 ‘모고해’ 죄까지 짓게 된다. 또 다시 고해소에 들어와서 고백했던 죄를 또 고백하는 것도 모자라 모고해 죄까지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각주:23]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화해

 

사제는 적절히 조언하고 알맞은 보속을 준 뒤, 신자에게 ‘사죄경’을 외워 죄를 용서한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를 통하여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사죄경은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 준다. 고해성사에서의 용서는 단순히 사제 개인이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심으로써 이루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지금 이 곳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하였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각주:24]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각주:25]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화해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각주:26] 이에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각주:27]라고 자부하는 교회의 권위를 빌어 사제는 용서를 베푼다. 사제는 대행인일 뿐, 궁극적으로 고해성사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콜레인 더 코터르, 「생명의 샘」(Fons Vitae), 1515년경에서 1517년경 사이, Museu da Misericórdia do Porto.

 

 

“회개하여라”라는 명령에 응답하기 위하여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단절이며 동시에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친다.”[각주:28] 비록 소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지는 않으나 분명한 “윤리적 무질서”[각주:29]이며, “사랑을 약화시키고 …… 윤리적 선의 실천과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며 …… 고의로 짓고도 뉘우치지 않은 소죄는 점점 대죄를 지을 수 있게 한다.”[각주:30] 

 

모든 죄는 많게든 적게든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한다. 하느님과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해를 입히며,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존엄에 상처를 입힌다.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인간을 지나치게 옭아매고 또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유롭고 존엄하게 잘만 사는데, 유독 신자들만이 유난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허덕이고 있다. 그러다가 그 갈증이 풀리지 않으면 어설픈 비관과 냉소로 스스로를 달랜다.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를 잇는 공통의 유대를 찾지 못하고 어떻게든 반목할 구실만 찾아 진영 싸움과 갈등에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각주:31]끼리 서로를 저주하고 죽어라 헐뜯고 있다.

 

소위 ‘자유로운 성관계’라는 것 또 어떤가? 그것이 우리네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나? 얼마나 많은 젊은 남녀들이 ―때때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연애로 간주되는 그런 관계 안에서조차― 잠깐의 감정과 쾌락에 스스로를 내맡기다가 그것이 큰 상처로 돌아 오고 또 자신들의 마음을 닳게 하고 있는가. 이조차도 얼마나 많은 증오와 분란의 원천이 되는지 모른다. 여기에 한 해에만 수만 명의 태아가 낙태로 살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남들의 눈 앞에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마음 속에라야 얼마나 많은 악을 품든지 상관이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각주:32]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각주:33] 그런 것들이 정말로 마음에만 머물러 있다면야 차라리 낫겠으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화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표출해 낸다.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든, 인터넷, SNS 상에서든.

 

사람들은 이 모든 죄가 스스로를 갉아 먹고 망가뜨리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애써 ‘으레 있을 수 있는 일들’이라 합리화하며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위조된 정상성’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 평생의 삶이란, 만인을 예속시키는 바로 그 죄를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몸부림이요 투쟁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던, “자신을 비우시어”[각주:34] 타자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 주시는 그 사랑을, “바로 그 마음을 …… [우리] 안에 간직하[기]”[각주:35] 위해 애쓴다. 그 구체적인 실천 중 하나가 바로 통회와 고백,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각주:36]인 보속인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단순히 버거운 의무로 생각한다. 고해성사를 자주 받는 신자라 할지라도 개중에는 고해성사를 그저 죄가 적힌 문서를 들고 가서 집어 넣는 파쇄기인 것마냥 취급하는 신자가 있다. 주일 미사를 빼먹을 때에나 하는 ―고해성사가 무슨 ‘대송’이라도 되는 것마냥― 번거로운 뒤치다꺼리로 여기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최악의 경우는 판공성사 때 겨우 떼워 먹는 연례 행사로 전락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회개의 한 과정이다. 하느님과의 화해다. 교회와의 친교가 회복되는 순간이다. 대죄로 상한 영혼을 치유하고 꺼트러진 내 마음의 참 사랑을 다시금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각주:37] 지겹도록 들은 말씀이나,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낯설게 다가오는 말씀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순 시기에야 말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한껏 만끽하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1.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 교회법 제989조. [본문으로]
  2. “죽을죄를 지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크게 통회를 했다고 해도, 성체를 모셔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고 또 고해 사제에게 갈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먼저 고해성사로 사죄를 받지 않은 채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1457항. [본문으로]
  3. “우리 주님께서 은총의 변함없는 원천으로 남겨주신 모든 거룩한 신비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 그 자체로 가득한 이 흠숭하올 성사를 남용하는 모독보다 더 끔찍한 앙갚음을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범죄는 없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비추어진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1코린 11,29] 이들의 죄악이 지닌 극악무도함을 선언할 때 그 지독한 결과를 명백히 보았으며 단호히 공언하였다. 사도는 바로 덧붙였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1코린 11,30.]” - The Catechism of the Council of Trent Published by Command of Pope Pius the Fifth, trans. Rev. Jeremiah Donovan (Baltimore: Lucas Brothers, 1829), part II, p. 146. [본문으로]
  4.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23-1424항 참조. [본문으로]
  5. 『천주교 요리문답』(1934), 제3장, 3절. [본문으로]
  6.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7항. [본문으로]
  7. 위의 책, 2115-2117항 참조. [본문으로]
  8. 위의 책, 2396항. [본문으로]
  9. 위의 책, 2477항 참조. [본문으로]
  10. 위의 책, 1860항. [본문으로]
  11. 위의 책, 1859항. [본문으로]
  12. Rev. Francis J. Connell, Outlines of Moral Theology (Milwaukee, WI: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58), p. 17. [본문으로]
  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4항. [본문으로]
  14.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1항. [본문으로]
  15. The Catechism of the Council of Trent Published by Command of Pope Pius the Fifth, part II, p. 185. [본문으로]
  16. Hanna, E. (1908). Contrition.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newadvent.org. [본문으로]
  17. 시편 51,19. [본문으로]
  18. 요엘 2,13. [본문으로]
  19. 시편 51,12. [본문으로]
  20. 루카 10,27-28. [본문으로]
  21. 마태 16,26. [본문으로]
  22.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2-1453항. [본문으로]
  23. 1요한 1,9-10. [본문으로]
  24. 콜로 1,20; 22. [본문으로]
  25. 로마 5,10. [본문으로]
  26. 요한 20,22-23. [본문으로]
  27. 2코린 5,18. [본문으로]
  28. 위의 책, 1440항. [본문으로]
  29. 위의 책, 1875항. [본문으로]
  30. 위의 책, 1863항. [본문으로]
  31. 야고 3,9. [본문으로]
  32. 마태 12,34. [본문으로]
  33. 마태 15,18-20. [본문으로]
  34. 필리 2,7. [본문으로]
  35. 필리 2,5. [본문으로]
  36. 마태 3,8. [본문으로]
  37. 마태 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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