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당에 들어오면 감실에 절해야 할까, 제대에 절해야 할까?’ 정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 봐도 관련된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에 대해서 압도적 다수의 신부님들이 주는 답변은 ‘감실이 아니라 제대에 절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소위 ‘제대파’ 신부님들이 내세우는 근거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당의 중심은 제대이다. ② 제대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③ 역사적으로 감실 보다 제대가 먼저 있었다. 순진무구한 교우님들은 ‘아~ 감실이 아니라 제대에 절하는 것이구나.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니 맞는 이야기겠지’ 하고 군말 없이 받아들이지만, 어떤 신자들은 왠지 모를 의구심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잠시만, 제대는 예수님을 상징하지만, 감실 안에 있는 성체는 예수님 자신이잖아? 그런데 예수님을 재쳐 놓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에 절을 한다니…?’
그렇다면 반대로 말씀하시는 ‘감실파’ 신부님은 안 계실까요? 적어도 한 분은 ‘제대가 아니라 감실에 절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구효성가톨릭대학 교수 손상오 루카 신부님입니다. 손 신부님은 감실이 아니라 제대에 절하는 경우를 두고서, 아버지한테는 인사하지 않고 옆에 있는 아버지 사진에만 인사하는 상황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징인 제단을 향해서 절은 하되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현존하시는 감실을 향해서는 절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방안에 들어서면서 중앙 벽에 걸려있는 아버지 사진에 절을 하고 그 옆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께는 인사하지 않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성당에 드나들 때는 제대가 아니라 감실에 절하는 게 맞습니다. 해외 신자들의 경우 성당에 드나들 때 한 쪽 무릎을 잠깐 꿇는 ‘무릎 절’(genuflection)을 하는데,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무릎 절은 흠숭을 뜻합니다. 이 무릎 절이 한국 교구에서는 깊은 절로 대체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성당에 드나들 때 하는 절은 감실 안에 계신 성체를 향해야 맞습니다.
무릎 절은 오른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꿇는 것이며 흠숭을 뜻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께 무릎 절을 하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식 때 하는 장엄한 십자가 경배부터 파스카 성야 시작까지 거룩한 십자가에 무릎 절을 한다.
주례 사제는 미사에서 세 번, 곧 축성된 빵을 거양한 다음, 성작을 거양한 다음, 그리고 영성체하기 전에 무릎 절을 한다.
…… 또한 제단에 있는 감실에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가 모셔져 있으면 사제, 부제, 다른 봉사자들은 제대에 나아갈 때 또는 제대를 떠나갈 때 무릎 절을 하지만,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에는 무릎 절을 하지 않는다.1
물론 총지침 상에서는 특수한 경우로서 십자고상에도 무릎 절을 하는 경우가 명시되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미사의 시작과 끝, 즉 사제가 제단에 오르내릴 때 오직 “제단에 있는 감실에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가 모셔져 있으면” 무릎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성체가 모셔져 있지 않고 오로지 제대만 있는 경우에는 무릎 절을 하지 않고 깊은 절만을 합니다.2
상기했듯 한국에서는 무릎 절과 깊은 절 둘 다 깊은 절 하나로 통일되었기에 이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한국 신자들이 성당에 드나들 때 하는 깊은 절은 본래는 무릎 절이므로, ‘흠숭의 의미를 지닌 깊은 절’로서 감실 안에 계신 성체를 향하는 게 옳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성당에 드나들 때 하는 깊은 절은 원래 성체를 향한 흠숭의 의미이다’라는 사실이 ‘성당에 드나들 때에는 반드시 성체를 향해 깊은 절을 해야 한다’라는 강제적인 규범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는 전례가 아니라 신자들 개개인의 사적인 신심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고 성호를 긋거나, 한국에서 웬만하면 성전 가운데 길로 걸어 다니지 않는 관례 등은, 오래된 전통이고 또 절대다수의 신자들이 따르고 있음에도 ‘성당에 들어갈 때 반드시 성수를 찍고 성호를 그어야만 한다’라든지 ‘성전 가운데 길로 걸어 다녀서는 결코 안 된다’라는 명시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적어도, ‘성당에 들어갈 때는 감실이 아니라 제대에 절해야 한다’라는 많은 신부님들의 주장에 직접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제대와 감실이 분리된 이유
그렇다고 해서 ‘사제씩이나 되는 분들이 말 그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정설인 양 떠든단 말이냐’ 하고 삐딱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제는 제단 벽에 붙어 있는 제대에서 회중을 등지고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1614년, 교황 바오로 5세가 로마 교구의 모든 성당들에 제대 위에 감실을 배치하는 것을 의무화한 이후로, 전세계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제단 벽 중앙에 붙어 있는 제대 위에 감실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체 변화를 부인했던 당시 개신교 종교 개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성체가 있는 감실에 모든 신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공의회 이전에 지어진 성당들을 보면 벽 제대 위에 감실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였던 제대와 감실을 분리하게 된 것은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혁의 영향입니다.
예컨대 교황 성 바오로 6세 당시인 교황청 예부성성4 훈령 「성체의 신비」(Eucharisticum Mysterium)는 미사 전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다양한 양상들을 거론하며, 가능한 한 미사 시작 때부터 제단에 성체를 모셔두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명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현존하시는 여러 가지 주요한 양상이 미사 집전에서 점차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선 당신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 집회에 현존하시는 것이 나타나고, 다음에는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당신의 말씀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당신을 대신하는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며, 마침내 성체 형상 안에 특수한 모양으로 현존하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표시라는 점에서는 성체성사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축성의 열매이며 그리스도 자신의 현시일 수밖에 없으므로 가능하다면 미사 집전 시초부터 이미 그 제단 감실에 성체가 안치되어 있지 않는 편이 오히려 성제 집전의 성질상 더 적합할 것이다.5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당신 이름으로 모인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 역시,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전례 때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을 대신하여 성찬의 희생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인격에도 현존하십니다.
이렇게 전례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간접적인 현존은, 마침내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함으로써 성체와 성혈의 형상 안의 참된 실제 현존으로써 정점에 다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 그리스도의 전 존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제대 위에 완전한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체가 미사 시작부터 모셔져 있다면 이러한 흐름이 깨져 버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스포일러를 당하는 것과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약 6년 뒤, 교황청 경신성성(前 예부성성, 現 경신성사부)은 「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 총지침」을 통해서 제대 위에는 감실을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합니다. 이미 성체가 제대 위에 있으면 성체가 미사 중 축성의 결과임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표지라는 특성 때문에, 미사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이 드러나지 않도록 미사를 거행하는 제대 위에는 성체를 모신 감실을 되도록이면 두지 않는 것이 거룩한 전례 거행 본성에 더욱 잘 맞는다. 실제 그리스도 성체 현존은 축성의 결과이며,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7
하지만, 오늘날 신축 성당들―특히 미국과 한국의 성당들―은 이러한 지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성당들이 제단의 중앙 부분을 애매하게 빗겨나간, 제단 구석 어정쩡한 위치에 감실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예부성성의 훈령에 나타난 다음의 권고에 따른 결과일 것입니다.
감실 안에 성체를 모셔 두는 장소는 성당이나 소성당[chaple, 경당] 안에서도 참으로 뛰어나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또한 그 자리는 사사 기도에 적합하도록 마련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기도로써도 성체 안에 계신 주를 쉽게 효과적으로 공경하기를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성당 중심 부분과는 격리된 곳에 감실을 안치하는 것이 좋다. 특히 결혼이나 장례가 자주 있거나,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보물 때문에 방문객이 많은 성당일수록 더욱 그러하다.8
하지만 이는 해당 지침의 맥락을 완전히 놓친 처사입니다. 해당 지침은 기본적으로 신자들의 사적인 기도, 즉 감실 앞에서의 성체 조배를 장려하고 있으며, 그러한 배려의 맥락에서 성체를 모셔둔 별도의 경당, 즉 “성체성사 경당”(The Blessed Sacrament Chapel)9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은 결혼, 장례, 문화유산 때문에 “방문객이 많은 성당일수록 더욱 그러하다”는 대목에서 분명해집니다. 방문객이 많이 드나드는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감실 안에 계신 성체를 조배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그러한 신자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성당의 중심 부분과는 격리된 곳, 즉 별도의 경당에 감실을 안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 지침에 대한 가장 완벽한 예시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성전의 중앙과는 격리된 북동 쪽 방향에 감실이 있는 경당, ‘성체성사 경당’(Chapel of the Blessed Sacrament)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stpetersbasilica.info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경당은 “오로지 기도하는 신자들을 위한”(for prayer only) 공간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의도와 실질적인 지침을 종합하면,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찬례의 의미가 더 완전히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최소한 제대 위에는 감실이 없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성당의 한 부분에 감실을 만들어 모셔 [둘]” 경우에는 “참으로 고상하고 잘 드러나고 잘 보이면서도 아름답게 꾸민 곳에, 또한 기도하기에 알맞은 곳에 마련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10
총지침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감실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ㄱ) 예식을 거행하는 제대가 아닌 가장 적절한 곳에 알맞은 형태로, 제단 안에 설치한다. 더 이상 예식 거행에 쓰지 않는 옛 제대 위에 설치할 수도 있다.
ㄴ) 성당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그리스도 신자들의 눈에 잘 띄며 개인적으로 조배하고 기도하기에 알맞은 다른 경당에도 설치할 수 있다.11
감실을 제단 안 옛 제대, 즉 벽 제대 위에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은, 감실을 제단 벽 중앙에 배치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상기했듯이 별도의 경당에 설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 애매모호한 변두리에 감실을 놓는 것은 교회의 의도를 놓친 것일 뿐만 아니라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지침 내용조차 교묘하게 빗겨 나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제단 벽 중앙에 감실을 놓으면 그 앞에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기 때문에 신자들의 시야에서 감실이 가려져 성찬례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 미사 중에조차 신자들의 눈에 밟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배치가 신자들이 사적으로 조배하기에 알맞은 위치인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지침은 성체 조배하는 신자들을 배려하려거든 별도의 경당에 감실을 마련하라고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실이 제단 벽 중앙에 있든, 제단 벽 측면에 있든, 회중석에 앉아 있는 신자 입장에서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교회가, “언제나 교회 생활의 중심[인]”12성찬례가 거행되는 제대, “성당의 중심인 제대”13에 우리 신자들의 마음을 한 데 모으기를 바란 것은 참으로 타당하고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의 구체적인 가르침들을 사목자와 평신도들이 오해하고, 결과적으로 ‘사제가 축성한 결실로서의 성체’라는 의미와 ‘성체를 사적으로 경배하고자 하는 신자들에 대한 배려’라는 두 마리 토끼 모두 놓치고 있는 것은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당에 들어오면 감실과 제대 중 어디에 절해야 하는가’라는 신자들의 혼란은, 감실이 제단 위 어중간한 곳에서 ‘시선 강탈’을 하게 된 작금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해결 가능한 문제
이 문제는 많은 신축 성당들에서 고착화되어버린 문제이지만, 언제까지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며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성당들 중에서도 제단 벽 중앙에 감실을 배치한 사례는 많습니다. 가자 지구의 성가정 성당(Holy Family Church)이나 의정부교구 참회와속죄의성당과 같은 훌륭한 예시들이 있습니다.

제단에 있는 감실을 이동할 수 있다면, 제단 중앙 벽이나 별도의 경당으로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감실의 위치를 옮기는 데 금전적 부담이 크다면 감실을 비워 놓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들의 입장에서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미사 중 신자들에게 분배할 성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사제와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바로 그 미사에서 축성된 성체로 주님의 몸을 모시[는 것이] …… 매우 바람직하다. 이러한 표지들을 통하여, 영성체가 현재 거행되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라고 밝힙니다.14 사실, 사제는 자신이 축성한 성체를 모시고, 신자들에게는 감실에서 미리 축성한 성체를 꺼내서 분배하는 매우 흔한 관례조차, 교회는 성찬례와 영성체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개선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와 감실의 싸움?
어떤 신부님은 제대가 아니라 감실에 절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과장된 성체 신심’이라는 폐단을 아직까지도 고수하는 사람들인 양,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사람들인 양 쉽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감실은 기본적으로 병자들이나 성찬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성체를 보관하는 용도일 뿐이며, 신자들의 신심이 감실 안에 계신 성체께로 향하는 현상은 우발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고 교회가 겨우 겨우 참아 주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병자를 위하여 성체를 보존해 둔 것이 성당에 모셔 둔 천상의 빵을 흠숭하는 아름다운 관습이 생기게 된 이유인 것 …… 이 흠숭의 배례는 확고부동한 이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며’, 특히 주의 실제적 현존을 믿는 신앙이 그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15이라고 주지하는 교회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교회 역시 “이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공경할 때에 신도들은 이러한 현존이 미사 성제에서 유래되고 성사적이며 영신적인 영성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16 사실을 외면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특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제11차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권고를 통해, 성찬례와 성체조배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시노드에서 가장 감명 깊은 순간 중 하나는 우리가 하고많은 신자들과 함께 성체 조배를 위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였을 때 찾아왔습니다.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닌 이 기도 행위 안에서, 주교단의 모임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과 성체성사를 조배하는 것 사이의 내재적인 관계를 지적하길 원하였습니다. 교회의 신앙 가운데 이 의미심장한 측면에 대하여 성장하여 나가는 감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바랐던 전례 쇄신 이후 다년간 우리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왔습니다. 개혁의 초기 단계 동안, 미사와 성체조배 사이 고유한 관계가 언제나 충분히 명백하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당시에 널리 퍼졌던 이의는 성체성사의 빵이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어진 것이지, 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기도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거짓된 이분법으로 드러났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렇게 적시하였듯이 말입니다. “ nemo autem illam carnem manducat, nisi prius adoraverit; peccemus non adorando ― 누구도 먼저 흠숭하지 않고서는 이 살을 먹지 않는다. 이 살을 흠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또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체조배는 성찬례 거행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귀결이요, 그 자체로 교회의 흠숭 행위 가운데 최상의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은 우리가 영한 그분을 흠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으로만이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되고, 이를 테면 천상 전례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사 밖에서의 흠숭 행위는 전례 거행 그 자체 가운데 자리 잡는 모든 것을 연장하고 심화합니다. 진실로 “오로지 흠숭으로만이 심오하고 진솔한 영성체가 성숙하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벽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와 타인을 갈라 놓는 벽까지도 허물고자 하는, 성체성사 안에 담긴 사회적 사명이, 정확히 주님과의 이러한 인격적 만남으로 굳세어집니다.”17
때때로 한국 교회 안에서 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제대와 감실의 싸움”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참 입에 담기에도 낯부끄러워지는 말입니다. 제대와 감실, 성체성사 거행(eucharistic celebration)과 성체성사 흠숭(eucharistic adoration)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둘이 서로의 고유한 본질을 드러내게끔 하면서도, 둘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이 제대와 감실 사이에 싸움을 붙였을 따름입니다.
무지(無知)로 인해 벌어진 이 상황이, 주님의 지혜를 청하여 해결되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평신도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사제에게는 겸허함과 용기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이미 그런대로 고착된 것이니 조용히 유연하게 넘어가자고 하기에는, 교황 레오 14세께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이 교회적 사건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재발견할 소중한 기회”를 널리 촉구하셨습니다!
먼 훗날, 교회의 전례 역사에 관한 책에 이런 내용이 기록될지 모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일부 지역 교회에서 감실의 배치를 놓고 성전 건축에 혼란이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정신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통하여 얼마 가지 않아 교정되었다.”
물론, 그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요약
① 성당에 드나들 때에는 제대가 아니라 감실에 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② 많은 신부님들이 반대로 가르치는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지침에 대한 혼란 때문입니다.
③ 감실을 제단 위 어중간한 위치에 배치하는 것은, 성찬례의 고유한 가치를 증진하고 신자들의 사적 신심을 장려하고자 했던 교회의 의도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④ “제대와 감실의 싸움”이란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 거행과 성체성사 흠숭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각주]
-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서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7), 274항. [본문으로]
-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9항, 90항 참조. [본문으로]
- 오래된 성당의 제단에 회중을 마주 보고 미사를 드리기 위한 새 제대를 배치하든, 아니면 신축 성당을 지을 때 아예 제대와 감실을 분리한 채로 짓든 간에 [본문으로]
- 오늘날의 경신성사부. [본문으로]
- 교황청 예부성성, 훈령 「성체의 신비」(Eucharisticum Mysterium), 1967.5.25., 서우석 신부 및 김남수 신부 공역, 55항. [본문으로]
- 마태 18,20. [본문으로]
- 교황청 경신성성,「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 총지침」,
1973.6.21., 6항. [본문으로] - 훈령 「성체의 신비」, 53항. [본문으로]
- 이는 해당 53항의 소제목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14항 참조. [본문으로]
-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15항. [본문으로]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3항. [본문으로]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2항. [본문으로]
-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5항. [본문으로]
- 훈령 「성체의 신비」, 49항. [본문으로]
- 위의 문헌, 50항. [본문으로]
- 교황 베네딕토 16세, 사도적 권고 「사랑의 성사」(Sacramentum Caritatis), 2007.2.22., 66항. [본문으로]